Gluck
지하철 여정 (旅程) 본문
지하철 개찰구에서 카드를 찍고 나올 때면
때로는 빨간 숫자로 100원, 200원의 추가 요금이 표기된다.
그 아래에는 한 달간 들인 교통비가 함께 뜨는데,
덕분에 날짜 감각에 다소 둔한 나로서는 지난 며칠간 얼마나
바빴는지 혹은 단조로웠는지
상기시켜주는 순간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는, 개찰구가 가까워지면
지갑을 꺼내들고 카드를 찍을 순간을 기다리고 있을 때
바로 앞사람의 그간 여정을 엿보는 데에도
꽤 유용하다.
삑, 그가 카드를 댈 때 추가 요금이 500원 붙으면
'아이코, 먼길 오셨네요. 고생하셨겠다.'
실로 그의 얼굴은 아침부터 꽤 지쳐있기도 하다.
그리고 다시 삑, 그녀가 카드를 댈 때
4월의 반토막이 훌쩍 지나갔음에도 불구하고
만 원도 채 되지 않는 금액만이 쌓여있으면
'오랜만에 외출이신가 봐요. 누구를 만나러 가시길래
그리 발걸음이 가벼우실까.'
오늘은 제법 비가 오던데 그녀 손에 우산이 없는 까닭은
1번 출구 앞에서 환히 웃어 보이는 일행 덕분이었나 보다.
삑, 어느새 내 차례가 되어 카드를 대면
이번엔 추가 요금 없이 삼 만원 조금 넘는 금액이 표기된다.
그리고 다시 삑, 뒷사람은 딱히 내 여정이 궁금하진 않았는지
제법 무심한 표정으로 카드를 찍는다.
그는 가볍게 개찰구를 통과했고, 이내 곧 성큼성큼 앞질러갔다.
오늘 당신은 서울 내 어디에 위치한 지하철에서 여정을 시작할까. 마칠까.
이를 궁금해하는 건 오로지 내 몫인 듯도 싶다.
은정- 시절과 공간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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